문인과 경제인들의 이색적인 모임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자리에선 경제인들이 1백억원의 기금을 마련해주면 이자 소득만도 1년에 10억원이 되니 문학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아직 성사여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의 작가와 빈곤, 작가정신, 문학과 사회등 우리문학의 현주소를 곰곰 생각게 한다. 우선 작가의 유복한 생활이 곧 문학 정진에 도움이 된다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을까. 지난 2월 사망한 극작가「테네시·윌리엄즈」는 그의 첫작품이 흥행에 실패한 뒤 코피 한잔으로 식사를 때우며 제2작품을 썼다. 바로 그의 출세작이 된 『유리 동물원』(1944년)이다. 『지쳐 죽을 것 같은 고생을 했다』고 후일 그는 회고했다. 너무나 잘 알려진「도스트예프스키」의 생애는 빈곤 바로 그것이었다. 빈민병원 의사의 7형제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유복한 동료들에 대한 열등감으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 시기에 「실러」를 암기하면서까지 치열한 문학수업에 심신을 태웠다. 22살때 육군성 제도공으로 취직한 그는 1년만에 월급장이를 탈피, 「경제적 최악의 위기」를 각오하면서 글을 썼다. 최초의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첫 성공에 도취한 그의 방종과 그 이후의 실패, 도박, 유형으로 얼룩진 생애는 알려진 그대로다. 그 속에서「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불후의 명작들이 탄생했다. 과거의 저명한 문학가들은 빈곤의 탈출을 자기의 재능에 맡겼다. 「세속적인 성공」은 얼마나 홑륭한 작품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은 것이다. 결코 그 일 이외의 것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흔히들 음악과 미술이 귀족과 부호의 비호로 꽃피웠다는 평을 든다. 일면의 진실이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구나 문학은 그 깊이와 폭에서 다른 예술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문인들이 그렇게 가난한 것인지, 그렇다면 가난의 기준을 어디에 둔 것인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케니·로저즈」같은 가수가 수백만달러짜리 저택과 부동산을 가진 것에 비하면 문인은 가난하다. 한국의 프로야구선수가 1억원에 스카우트되는 것에 비해도 그렇다. 경제인과의 대화중엔 가난한 문학인들 보다는 근로자들에게 급료를 더 많이 주라는 말도 있었다고 들린다. 가난이 문학의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그것을 스스로 싸워 이기는 것이야 말로 건실한 시민의 자세다. 문인의 재산은 글을 쓰겠다는 자신의 광기, 영감, 창조력, 열성이지, 결코 외부의 자선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