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무덤들은 그 시대의 문화적인 배경을 보여주는「타임·캡슐」의 구실을 한다. 미술·공예·생활·건축문화는 물론 사상의 일면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통일신라 이후는 장제가 바뀌면서 분묘의 모습이 달라졌다. 그러나 상고시대의 무덤들은 한결같이 그 시대를 뚫어 볼 수 있는 유일한「쇼·윈도」이기도하다. 더구나 왕의 묘는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극치의 경지를 이루고있다. 옛날 사람들은 동서를 불문하고 분묘를 사후의 생활권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는 처와 종자들을 함께 묻어 버렸다. 순장의식이 바로 그 경우다. 또 왕이나 귀족이 생시에 누리던 생활환경까지도 그 분묘 속에 그대로 재현시켰다. 순장의 유적은「이집트」의 제1왕조인「나르메르」왕의 묘, 「메소포타미아」의「우르」왕묘, 중국 하남성 안양의 무관촌에서 발견된 은의 대묘 등이 유명하다. 우리 나라에서도『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순장제가 있었다. 신라 지증왕(AD500∼514)에 이르러 비로소 그 순장제는 금지되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산 째로, 혹은 죽여서 함께 묻는 행위에 도덕적인 회의를 갖게된 것이다. 최근 대구의 경북대와 계명대의 합동조사반이 발굴한 가야의 고분은 상당한 규모인 것 같다. 고고학자·사학자들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는 일명 가락국·가라·가라 등으로 불린다. 지금의 낙동강하류에 자리잡았던 이 고대국가는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1세기의 역사를 갖고 있다. 설화를 보면 후한의 광무제 때 가락지방의 구간이 무리를 이끌고 귀지봉에 올라 거북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때 6개의 알이 든 금합자가 붉은 줄에 매달려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에 안치해 두었더니 다음날 6명의 동자가 나오고, 이들은 열흘만에 모두 어른이 되었다. 3월 보름에 이들은 모두 왕위에 올랐는데 그 첫 왕이 금관가야의 수로왕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5명도 부족국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육가야의 유래다. 이 나라들은 중국 한 대문화의 영향을 받고, 또 가까운 지방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사학자들은 그 문학수준도 상당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요즘 고령에서 발굴된 가야고분은 순장의 흔적과 함께 마구와 고대인의 유골까지도 찾아냈다. 학문적인 성과는 연구의 과제이지만, 우리 민족의 맥락을 더듬는 노력은 값있는 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