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 하나. 졸본지방(卒本地方)을 중심으로 기원 전후 시기에 성립하여 668년에 멸망하였다.
성립과 발견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고구려는 BC 37년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갈래로 압록강 지류 동가강 유역에 건국한 나라라고 한다. 가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지방에서 일어나 동방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처음에 고구려는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여 현도군을 쳐서 푸순〔撫順〕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과 낙랑군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임둔군의 옛땅에 자립한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태조왕은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고,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였다.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에는 서안평(西安平)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이어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은 372년에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373년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을 구축하였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재위 391~413)은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북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은 제도의 정비와 내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그는 중국의 남북조(南北朝;北魏· 宋)나 유연과 다각도로 외교관계를 맺고,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국력을 더욱 신장시켰다. 그는 또 475년에 백제의 서울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완전히 지배하였으며 신라의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빼앗았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재위 491~519)은 494년에 부여(夫餘)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고구려는 남쪽으로 신라· 백제와 맞서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와 겨루게 되었는데, 마침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612년(영양왕 23)에는 수나라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으로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강력한 항전으로 다시 실패하였다. 그러자 양제는 다시 30만 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는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에서 이를 섬멸하였다. 그 뒤 수나라는 멸망하고 당나라로 바뀌었는데 당나라는 계속 고구려를 넘보았고, 마침내 645년(보장왕 1) 당태종(唐太宗)이 30만 대군으로 랴오허강〔遼河〕을 건너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60여 일 되는 사투 끝에 당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그 뒤에도 당은 2~3차례 침입을 감행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고구려는 668년(보장왕 27) 나· 당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함으로써 주몽(朱蒙) 이래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왕조는 막을 내렸다. 당시의 내정을 본다면 70여 년에 걸친 수· 당을 비롯한 거란· 신라와의 싸움으로 많은 국력이 소모되었고 연개소문의 독재는 마침내 민심을 혼란시켰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은 뒤 세 아들(男生· 男建· 男産)의 불화는 내분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거기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가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기회를 이용한 나· 당연합군은 668년 27만의 신라군과 50만의 당군으로 평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구려의 관제를 살펴보면 고구려 초기의 관제는 왕 아래에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등의 관리가 있었고, 왕과 제가(諸加)는 사자(使者)· 조의(早衣)· 선인(先人) 등의 가신(家臣)들을 거느렸다.
평양천도 이후 행정조직과 관등조직이 정비되었는데 수상인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등 10여 관등이 정비되었고, 수상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행정구역은 중앙을 동· 서· 남· 북· 중(내)의 5부로 나누어 대가(大加)들이 통치하였다. 소수림왕 때인 373년에 율령이 반포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이 372년에 설립되어 오경(五經)· 삼사(三史) 등을 가르쳤다. 지방에 설치한 경당은 사립학교로서 경전과 기마(騎馬)· 궁술 등을 가르쳤다.
고구려의 시가(詩歌)로는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 을지문덕의 〈오언시(五言詩)〉 등이 전하며 왕산악(王山岳)의 거문고는 유명하다.
고구려 예술의 특징은 와당(瓦當)의 귀신상과 고분에서 나온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에서 나타나는 웅대하고 건실한 기풍이다. 특히 강서고분(江西古墳)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벽화 중에서 최우수작품으로 꼽힌다.
불교는 372년에 들어온 이후 활발히 전파되었는데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 384~91) 때는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도록 권장하였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 호류사〔法隆寺〕 금당의 벽화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