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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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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5도 양계
고려의 5도 양계
고려청자
고려청자


(高麗)


목차

| 편집 | 개요

신라왕건(王建)이 세운 왕조. 918년 후삼국을 통일하여 건립한 이후 1392년 이성계조선을 건국하기까지 474년 동안 존재하였다. 수도는 개성이다.


| 편집 | 고려의 성립과 발전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호족세력을 배경으로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를 세워 연호천수(天授)라 하였다. 왕건은 처음 철원에서 즉위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통합정책· 북진정책· 숭불정책(崇佛政策)을 펴서 세력을 구축하였다. 935년에 신라를 병합하였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하였다.

태조는 호족세력 통합의 방도로 호족과의 정략결혼을 권장하였고, 제4대 광종(光宗)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과거제도· 공복제도(公服制度) 등을 실시하여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제5대 경종(景宗)은 전시과(田柴科)라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마련하여 관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였다. 또 제6대 성종(成宗)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하여 유교적 정치사상에 입각한 3성(三省) 6부(六部)의 중앙관제를 마련하고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제 강화에 힘썼고, 제11대 문종(文宗)은 율령(律令)· 관제(官制)· 병제(兵制) 등을 완비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성하였으나 문종의 문치정책은 문운을 크게 떨치는 반면에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문종 이후 제17대 인종(仁宗) 때까지 인주이씨(仁州李氏)인 이자연(李子淵)· 이호(李顥)· 이자겸(李資謙)은 7대에 걸쳐 80년 간 왕실과 중복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외척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126년 이자겸은 권력독점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으며, 이어 척준경(拓俊京)· 정지상(鄭知常)· 김부식(金富軾)이 차례로 귀족정치를 펴는 동안 귀족정치의 모순이 폭발하여 고려는 점차 내란기에 접어들었다.

35년(인종 13)에는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났고,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毅宗)이 향락만을 일삼고 정사를 소홀히 하자 무반 차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의 무신들이 70년(의종 24)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내고, 명종(明宗)을 즉위시켰다. 이후 무신간의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어 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죽이고 집권하였고, 경대승이 죽자 83년 이의민(李義旼)이 집권하였다. 96년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여 최씨 무신정권은 우(瑀)· 항(沆)· 의()의 4대에 걸쳐 6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이 결과로 전시과는 붕괴되고 천민과 농민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 사회질서가 문란해졌다. 73년 김보당(金甫當)의 난, 74년 조위총(趙位寵)의 난과 승려들의 반란, 76년 공주(公州) 명학소(明鶴所)의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의 난, 82년 전주의 관노 죽동(竹同)의 난, 93년 김사미(金沙彌)의 난과 효심(孝心)의 난, 98년(신종 1)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 1217년의 최광수(崔光秀)의 난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31년(고종 18) 몽고의 침입을 받아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였으나 59년 끝내 원(元)과 화의하여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恭愍王) 때까지 80여 년 간은 원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을 잃고 말았다. 고려는 대외정책으로 친송배요(親宋排遼)를 표방한 북진정책을 썼으므로 3차례나 거란의 침입을 받았고, 여진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숙종 때 오아속(烏雅束)이 함흥(咸興)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자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게 하고 9성(九城)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이 환부를 애걸해 왔고 수비의 곤란과 보수세력의 성장 때문에 고려는 구성을 포기하였고, 이후 여진족은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요나라를 정벌한 뒤, 1126년(인종 4) 고려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강요하였다. 그 뒤 1370년 공민왕 때에 이르러 지용수(池龍洙)와 이성계(李成桂)가 요동을 공략하여 요양(遼陽)을 점령하기도 하였고 역시 공민왕 때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우왕(禑王) 전후기의 왜구의 침입은 국정을 불안하게 하고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 뒤 명나라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자 이에 분개한 최영(崔瑩)은 88년(우왕 14)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는데, 이때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고양(高陽)으로 귀양 보내고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 편집 | 중앙 및 지방관제

제6대 성종(成宗) 때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 때에 일단 완성되었다. 체제의 특징을 보면 3성 6부는 당제(唐制)에 가깝고, 중추원과 삼사(三司)는 송제(宋制)를 채용한 것이며, 도병마사식목도감(式目都監)은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품계는 문반과 무반인 양반제를 두고, 관등급은 정(正)· 종(從) 각 9품씩 도합 18품으로 나누었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은 각각 2품과 3품을 획선으로 하여 상하 이중적 조직으로 그 직무도 달랐다.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의 고관은 재신(宰臣)이라 하여 정책을 수립· 결정하고 3품 이하의 관원은 성랑(省郞)이라 하여 봉박(封駁)과 서경(署經) 등의 임무를 맡았다. 실제 행정은 6부가 직접 국왕의 명을 받아 시행하였다. 한편 지방관제는 983년(성종 2)에 12목(牧), 995년에 10도(道)· 3경(三京)· 5도호부(五都護部)· 8목· 양계(兩界)가 마련되고, 1018년(현종 9)에 전국을 도와 양계로 나누어 그 밑에 4도호(四都護)· 8목을 위시하여 군(郡)· 현(縣)· 진(鎭) 등을 설치하였다. 5도제가 전국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예종(睿宗)· 인종(仁宗) 이후의 일이다.


| 편집 | 토지제도

940년(태조 23)에 역분전(役分田), 976년(경종 1)에 전시과(田柴科)제도를 실시하였고, 998년(목종 1)에 비로소 관직의 고하에 따라 18과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한 개정전시과(改正田柴科)가 마련되었다. 조세(租稅)의 납부는 성종 때 수조권(收租權)이 개인 또는 관청에 있는 사전(私田)은 수확의 2분의 1을 조(租)로 바치고, 수조권이 국가에 있는 공전(公田)은 4분의 1을 조로 바치게 하였다. 또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공부(貢賦), 과일나무· 삼밭〔麻田〕 등에 부과하는 잡공(雜貢) 등이 있었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평민 남자에게는 병역과 부역의 의무가 있었다.


| 편집 | 화폐제도

처음에 곡물과 베〔布〕로 물물교역을 하였으나 996년(성종 15)에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전(鐵錢)을 만들어 썼고, 1102년(숙종 7)에는 해동통보· 해동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동국통감· 동국중보를 주조하였다. 제34대 공양왕 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인 저화(楮貨)를 발행하였으나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 편집 | 교육제도

태조 때부터 개경학(開京學), 서경학(西京學)을 두었으며 992년(성종 11)에 중앙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경학박사· 의학박사를 1명씩 파견하였다. 제11대 문종 때는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 등 12공도의 사립학교가 개경에 설치되어 사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1127년(인종 5)에는 지방교육기관으로 향학(鄕學)이 설치되었다.


| 편집 | 신분제도

고려는 신분의 세습을 원칙으로 하는 양반관료와 중인· 평민(농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왕족과 귀족으로 편성된 상류층은 부는 물론 정권에 참여하여 출세의 길도 독점하였고, 중류층은 남반관리(南班官吏)· 기술관· 하급관리· 하급장교 등 지배층의 말단에 종사하였다. 하류층인 평민은 일반 주· 군· 현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 편집 | 풍속

부처에 제사 지내는 연등회(燃燈會)와 토속신앙불교가 융합된 팔관회(八關會)가 성행하였으며, 설날· 대보름· 삼짇날· 석존제· 단오절· 유두· 백중· 중추절 등의 명절에는 각기 독특한 풍속이 있었다.


| 편집 | 지배적 이데올로기

불교와 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유학은 1289년(충렬왕 15) 안향(安珦)이 옌징〔燕京〕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 온 이후 크게 발전하였고, 고려 말에 이르러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길재(吉再) 등의 뛰어난 성리학자를 배출하였다. 역사편찬으로는 1145년(인종 23)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아 삼국의 역사를 보수적 유교사관에 맞추어 기록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는데 불교 입장에서 고대문화와 관계되는 주요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불교는 왕실과 민간의 신앙대상이었으며, 국가가 정책적으로 보호· 육성하였고, 정치세력과도 연결되어 현실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 편집 | 고려문화

특히 발달한 것은 인쇄술로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 숙종 때의 《속장경》, 고종 때의 《팔만대장경》 등이 있으며, 금속활자독일구텐베르크의 것보다 200년이나 앞서 1234년(고종 21)에 발명되었다. 끝으로 고려예술은 귀족적· 불교적 색채를 띤 미술이 성행하였고, 석탑· 석등· 불상 등 조각분야는 퇴화하였다. 특히 자기· 나전칠기· 불구(佛具) 등이 발달하였는데 그 중에서 상감청자는 세계적인 공예품으로, 민족예술의 정수로 일컬어진다. 고려의 대표적 화가로는 이영(李寧)· 이광필(李光弼)· 공민왕 등이 유명하며, 글씨로는 최우(崔瑀)· 이암()· 유공권(柳公權)· 한수(韓脩) 등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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